글로 배우는 그림도구
유화
삐뚤게 쓴 베레모. 물감이 덕지덕지 붙은 앞치마, 알록달록한 물감이 올려져 있는 팔레트. 빛이 잘 드는 자리. 이젤엔 커다란 캔버스가 올려져 있다. 화가의 손은 붓에 물감을 찍어 커다란 캔버스에 한 덩어리씩 올리자 조금씩 완성된 형태가 캔버스에 올라간다.
그림 그리는 이들의 로망, 캔버스에 그리는 유화
많은 사람이 유화를 그리고 싶어 한다. 화가라고 하면 동그란 팔레트를 들고 베레모를 쓰고는 커다란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화가=유화란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유화를 그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다. 600년부터 지금까지,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면 거의 유화물감을 사용했으니 ‘화가라면 유화’란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음이 자연스럽다. ‘참 쉽죠’란 말을 한 밥 아저씨가 그린 것도 유화다.
유화가 로망이지만 도구가 많이 필요해 보여 도전하기 어렵게 보인다. 하지만 막상 그려보면 필요한 것이 많을 뿐 밥 아저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렵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안다. 그리고 접하기 어려운 다른 이유가 보인다. 집에서 그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무엇이 어려울까? 일단 기름을 쓰기 때문에 냄새가 많이 나 방안에 기름 냄새가 가득하게 된다. 냄새 없는 기름을 쓴다 하더라도 환기하지 않으면 두통을 일으키기 쉽다. 또, 마르는 시간이 길어 그동안 손이나 물건이라도 닿으면 그림도 망치고 청소 거리도 늘어난다. 점성이 있어서 잘 튀지 않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잘 튄다. 유화를 그리는 화가의 작업 사진을 보면 앞치마에도 토시에도 바닥에도 이젤에도 튄 물감을 볼 수 있다. 환기가 잘되는 전용 작업 공간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그림이 바로 유화이기에 더욱 화가의 아이템으로 보인다.
미술계를 석권한 유화의 탄생
유화는 색을 내는 물질인 안료와 린시드 오일(아마씨유)를 섞어 만든다. 현대 유화의 시조로 알려진 사람은 벨기에 화가 반 얀 에이크다.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손꼽힌다. 반 얀 아이크가 현대 유화의 시조라고 말하기는 하나 그전부터 존재했던 기법을 정립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오래된 기록에서 유화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고 2008년엔 7세기의 유화가 발견됐다. 오래전에 유화물감이 사용됐으나 세월이 가며 잊혔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유화는 이전에 범용적으로 쓰이던 방식인 에그템페라에서 태어났다. 에그템페라는 안료를 신선한 달걀 노른자와 섞어 그리는 그림이다. 달걀 노른자는 튼튼한 도막을 만들어 안료를 고정한다. 에그템페라 그림을 보존하기 위해 달걀과 린시드를 섞어 바니시로 사용하는데 반 얀 에이크는 바니시를 연구하다 힌트를 얻어 안료와 린시드와 다른 재료를 섞어 만든 유화 물감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금방 새로운 물감에 익숙해졌다. 16세기가 되자 기본적인 물감으로 유화가 정착됐고 금새 유럽의 거의 모든 화가가 유화로 그림을 그리게 됐다. 그 뒤 600년 동안 화가가 그리는 그림하면 유화를 의미했다.
유화를 그릴 때 쓰는 기름
유화에서 쓰는 기름은 두 가지. 건성유와 속건유다. 건성유는 마르면서 점성이 증가해 고체가 되는 기름을 말하며 속건유는 휘발성이 강해 빠르게 마르는 기름을 말한다. 건성유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산소와 접하면서 분자들이 서로 연결되며 안료를 캔버스에 고정한다. 속건유는 물감의 유동성을 높이고 빠르게 마르게 하나 광택을 제거하고 물감의 접착력을 떨어트린다.
건성유에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린시드오일 외에 호두씨유, 해바라기씨유, 양귀비씨유 등이 있고 속건유에는 터펜타인(테레핀) 오일, 페트롤, 화이트 스피릿(미네랄 스피릿) 등이 있다. 많이 쓰는 것은 린시드와 터펜타인이지만 다른 기름도 각각의 특징이 있다.
린시드 오일은 아마씨에서 추출한 기름이다. 건조 속도가 빠르고 색상을 선명하게 유지하며 희석에도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하지만 마르면서 약간 누렇게 변하기에 마무리 단계에서 밝은색 물감을 쓸 때엔 양귀비씨유(뽀삐오일) 사용을 권장한다. 뽀삐오일은 말라도 투명함을 유지하지만 건조 속도가 느리고 비싸기에 한정적으로 사용한다. 호두씨유 등의 다른 기름은 린시드유와 뽀삐유의 중간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에선 미술용으로 구하기 힘들다.
터펜타인 오일은 소나무에서 채취한 송진을 증류해 만든다. 휘발성이고 냄새가 많이 난다. 유화를 그릴 때 나는 기름 냄새가 바로 터펜타인 냄새다. 물감을 희석하는 용도 이외에 튄 물감을 지우거나 도구나 붓을 쓸 때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냄새가 많이 나고 수지 성분이 있어 밝은 화면에선 약간의 황변을 일으킨다. 닦는 용도로 썼을 때도 수지가 약간 남는다. 그래서 페트롤이나 화이트스피릿을 쓰기도하는데 냄새가 적으나 접착력도 터펜타인보다 떨어진다. 그러나 수지 성분이 남지 않아 깔끔하게 마른다.
유화를 그리기 위한 도구
유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여러 도구가 필요하다. 유화물감, 캔버스, 린시드오일, 터펜타인오일, 기름통 두 개, 젯소, 붓씻는 기름과 그 기름을 넣을 통, 넓은 면적을 칠할 붓 둘, 유화 붓 세필 하나, 필버트 붓( 1,4,8,12,18호), 팬 붓 하나, 팔레트. 팔레트 나이프, 사포가 필요하다.
먼저 젯소를 물에 희석해 약간 걸쭉하게 만들어 캔버스에 바른다. 한 번 바르고 말리는 걸 4~5회 정도 반복한다. 그러면 어느 정도 두께가 되는데 사포로 균일하게 깎아준다. 이 과정이 귀찮다면 미리 젯소가 발린 캔버스를 구입하면 된다.
캔버스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면으로 된 천, 아마로 된 천이다. 아마천으로 된 캔버스가 더 고급이다. 아사천이라고도 부른다. 연습용으론 면으로 된 것이면 충분하다. 면 캔버스의 단점은 습도에 따라 수축과 팽창 정도가 크다.
캔버스 틀은 네 부분이 완전 고정이 돼 있는 것과 크기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전자를 가와꾸라 부르고 후자를 정와꾸라 부른다. 가와꾸 캔버스는 나무가 약한 편이라 잘 휘고 나무가 닿는 부분의 천을 변색시킨다.
정화꾸 캔버스를 사면 8개의 나무 조각이 들어있다. 이 조각을 틀 모서리의 홈에 끼워 넣은 후 캔버스 천이 습기를 먹어 늘어났을 때 약하게 두드려 넣으면 캔버스 틀이 벌어져 천을 팽팽하게 당긴다.
팻 오버 린과 글래이징 기법
요즘은 옛날처럼 고려할 것이 많진않다. 꼭 지켜야할 것이라면 팻 오버 린(fat over lean)이다. 기름기가 적은 표면 위에 기름기가 많은 물감을 칠하란 이야기다. 그림을 칠하는 초반에는 터펜타인 같은 속건성 기름의 비율을 높여(린시드3:터펜타인7 정도) 빨리 마르게 하고 덧칠하는 물감일수록 먼저 칠한 물감보다 기름기가 많게, 즉 건성유의 비율을 높인다(린시드7: 터펜타인3).
이 비율이 중요한 이유는 마르는 속도다. 속건유의 비율이 높을수록 빨리 마르고 건성유 비율이 높을수록 느리게 마르는데 밑층이 먼저 말라야 그림 표면이 갈라지지 않는다. 그림을 얇게 그린다면 딱히 상관없다.
유화의 중요한 기법 중 하나가 글래이징이다. 글래이징은 투명한 물감의 성질을 살려 린시드나 뽀삐유를 섞어 덧칠해 밑색이 덧칠한 색을 통과해 보이게 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으로 에그템페라를 사용하던 이전과는 다른 풍부한 색감과 깊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밝은 색으로 밑 칠을 하고 완전히말린 후 투명한 성질의 물감을 희석해 덧칠하면 된다. 투명한 물감은 물감 튜브 옆에 적혀 있는데 투명한 물감은 □, 불투명한 물감은 ■표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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