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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재료와 리뷰/선화 재료

글로 배우는 그림 도구 - 연필

by 사탕고양 2017. 6. 7.

화실에 연필 긋는 소리가 가득 찬다. 평소라면 음악이 흘렀겠지만 오늘은 모든 소리를 끄고 연필 소리에 집중해보라며 음악을 껐다. 연필심은 종이 표면을 지나며 소리를 낸다. 필기구가 종이를 지나는 소리를 녹음해 들려주는 사람도 있다. 연필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진동은 손을 타고 전해져 온다. 때론 힘을 빼고 연한 선을, 때론 힘을 줘 진한 선을. 수천 번의 선을 그으면 선명한 이미지가 완성된다. 지금도 사람들은 연필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그림 도구가 연필이고 연필은 그림의 시작이자 무엇을 그리더라도 함께하는 동반자다.

 

 

그림 도구가 될 운명이었던 흑연

연필을 이루는 핵심인 흑연이 이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그랬다. 흑연은 지하에서 커다란 압력을 받으며 생겨난 순간부터 먼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릴 용도로 사용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채광되는 흑연의 단 7%만이 연필로 만들어지고 나머지는 산업용으로 사용되고 있긴 하다. 필기구 종류가 부족했던 과거엔 더욱 많은 비율이 연필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연필은 종이의 표면을 지날 때마다 검은 선을 남긴다. 그 선 하나하나는 무엇하나 같은 것이 없다. 긋는 힘의 정도에 따라, 각도에 따라 속도에 따라 미묘하게 선의 굵기와 진하기가 바뀐다. 연필을 잘 다루는 고수라면 한 번 긋는 선에 많은 변화를 줄 수 있을 정도다. , 변하지 않기에 연필로 기록되고 그린 그림은 종이에 문제가 생겨서 사라질 때까지 보존된다. 그렇기에 과거부터 미래까지 사랑받는 도구일 듯하다.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영화의 대본을 쓰는 것과 음악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손과 어깨에 힘을 빼고 아주 연하게 선을 그어 계획을 잡아 나간다. 처음 연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이 연하게가 힘들다. 어깨에서 힘을 빼자 그림도 글도 운동도 공부도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의 틀을 잡고 수직 수평을 측정하며 계획을 잡는다. 모든 계획이 그러하듯 머릿속에서만 완벽하다. 종이로 옮기는 순간부터 틀어진다. 그래서 선을 연하게 긋기가 중요하다. 연하게 그으면 지우기 쉽다. 사실 지울 필요도 없다.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면 더 강한 선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된다.

 

 

 

흑연으로부터 연필이 될 때까지

연필심을 영어로 Black Lead라 부른다. 말 그대로 흑연(黑鉛), 검은 납이다. 이름은 납이지만 납과는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다. 흑연은 탄소로 이루어져 있어 구성된 원자 자체가 다르며 납같이 유연하지 않아 쉽게 부러지고 가루가 된다. 전기가 잘 통한다는 점은 비슷하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다.

 

그럼에도 납이라 부르는 이유는 흑연이 등장하기 전, 중세 유럽에서는 나무 조각 사이에 납 합금을 끼워 넣어 지금의 연필과 비슷하게 썼기에 그 도구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또 흑연은 영어로 graphite라고 부르는 데 쓰기/그리기란 뜻의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이 녀석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용도라 칭하고 있다.

 

처음부터 흑연이 필기구나 그림 도구였던 것은 아니다. 1565년 영국에서 대규모 흑연광산이 발견되기 전에는 소량이 도자기를 장식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광산이 발견된 직후엔 군사용으로 사용됐지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데 더 사용하기 좋아 조각들이 밀반출됐다. 결국 문장가들과 예술가들의 열광적인 사랑으로 필기구로의 흑연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랫동안 연필은 영국에서만 생산됐다. 영국 이외의 국가에서 질 좋은 흑연 광산을 발견할 수 없어서 기도 했다. 당시에는 흑연 덩어리로만 연필을 만들 수 있었다. 영국 밖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흑연 조각 정도.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고, 흑연 조각에서 연필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개발됐다.

 

1790년대에 프랑스의 니콜라스 자크 콩테(Conté 창업), 오스트리아의 조셉 하드머스(Koh-I-Noor 창업)가 흑연과 점토를 혼합해 가마에서 굽는 방법을 발명했다. 이 두 회사는 지금도 연필과 그림도구를 만드는 회사다. 점토를 혼합해 굽는 방법은 연필의 진하기를 원하는 대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이 두 회사만이 아니라 전부터 세계 곳곳엔 연필 공장이 세워지고 있었다. 흑연 가루로 연필심을 만드는 기술이 보급되자 말 그대로 연필이 세상에 뿌려졌다. 대량생산에은 규격화가 필수다. 파버카스텔에서 연필의 제조 방법을 표준화해 6각형. 174mm 길이 H, B라는 경도 단계 등을 만들어 냈고 이 표준안은 지금도 모든 연필에서 사용된다.

 

BlackB, HardH

연필이 규격화됐더라도 거기서 나오는 글과 그림은 규격화되지 않았다. 아니 규격화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린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그림이 다르다. 그림용 연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흑연이 균일하게 갈려 있어 그림을 그릴 때 걸리는 것이 없고, 겹쳐 쌓을 때 미끄러지지 않는 고급연필이면 된다.

 

고급연필이란 기준이 무척 높을 듯하게 느껴지지만 한 자루에 700원짜리 T 브랜드의 연필이면 충분하다. 몇 배의 가격인 연필이 많이 있지만 결과물은 모두 한결같으며 차이는 온전하게 그리는 사람만 느낄 수 있다. 비싼 연필이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다. 연필심이 종이를 지나는 감각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계속 손끝으로 전달되는 감각이며 연필을 더욱 사랑하게 만다.

 

연필은 HB를 중심으로 진하고 B에 붙은 숫자가 클수록 더 진해지며 H에 붙은 숫자가 클수록 연해진다. 최대 9H부터 중간의 HBF를 거쳐 9B까지 20단계가 있는데 표준화된 것은 아니라 어떤 브랜드는 단지 몇 단계밖에 없기도 하고 진하기도 다르다. 같은 4B라 하더라도 어떤 브랜드는 연하고 어떤 브랜드는 더 진하다.

진하기가 다르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필압을 변화로 아주 연한 색부터 완전히 검은색까지 표현할 수 있어서다. 다양한 진하기의 연필을 사용하는 쪽이 더 편하게 명암을 표현할 수 있다. 스케치나 피부의 표현은 연한 2H H로 하고 더 진한 어두움은 6B로 그리면 쉽게 명암 단계를 낼 수 있다.

 

 

연필그림이 기초인 이유

그림을 시작하면 연필로 그림을 그리라 하지만 그것이 왜 중요한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연필그림이 중요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 필압과 속도로 변화무쌍한 진하기와 굵기를 표현하는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엄청난 단계의 명암표현으로 흑백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다.

 

인간은 색의 차이보다 명암의 차이를 더 먼저, 그리고 잘 느낀다. 생물이 눈을 가지가 된 이후 수억 년 동안 본 것은 명암의 세계고 포유류 중에서 가장 색을 잘 구분하고 볼 수 있게 된 지금도 명암의 차이를 더 잘 본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명암의 구분이 중요하며 색이 달라도 같은 명도라면 금방 구분할 수 없다. 좋은 그림은 흑백으로 사진을 찍어도 명확하게 보인다. 그래서 연필로 그리는 수십 수백 단계의 명암으로 그리는 연습이 필요하고 그것을 연필로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그림 팁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흑백으로 찍었을 때 명암이 다양하고 구분하기 쉽다면 가독성이 좋은 그림이 된다. 그림을 그리는 도중이 종종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자신의 그림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어 연습에 많은 도움이 된다.

 

연필로 그림을 그릴 때 팁은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선을 그을 때 조금씩 연필을 돌리면 균일한 굵기의 선을 그을 수 있다. 긋는 중에 돌리는 건 힘들어서 연필을 땔 때 육각형의 한 칸씩 돌리면 된다. 유명한 U모 회사의 샤프도 이런 원리로 샤프심을 균일하게 닳게 해 선의 굵기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또 하나의 팁은 연필로 처음 색을 깔 땐 연필을 뉘어 칠하는 것이 좋다. 흑연이 종이 표면에 살짝 올라와 있어 지우기 쉽고 종이에 잘 남지 않는다. 진하게 하고 싶다면 연필심을 뾰족하게 깎은 후 연필을 세워 다양한 방향으로 칠하면 거의 완벽한 검은색을 만들 수 있다.

 

연필로 그린 그림은 종이에 단단히 밀착돼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종이 위에 올려져 있거나 종이 섬유에 끼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손가락이나 종이로 문지르면 번진다.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연필 선을 손가락이나 찰필로 문지르면 선을 부드럽게 펼 수 있는데 부드러운 명암 표현은 물론이고 실력이 더 좋아 보이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연필그림은 양장 노트에 그리자. 스프링제본 노트에 그리면 종이가 문질러지며 연필 그림을 희미하게 만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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