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완성된 12색 수제물감 세트
오래전 물감을 모으면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물감을 만들어 쓰지는 말아야지. 단순히 물감을 모은 것만이 아니고 관련된 지식도 모았거든요. 어떻게 쓰는지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까지요. 회화도구라면 종류별로 한 번씩은 다 써봤어요. 다 잘 한 다는 건 아니고 다 써봤다는 것 정도지만요. 물론 잘 알지 못할 때 쓴 것도 많이 있습니다. 아크릴이나 유화가 그런 류에요.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했을 때가 6년 전쯤이네요. 회사에 갔을 때 거기 직원분이 저를 강력추천했던 이유가 이력서 한 구석에 작게 써 있던 것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자기는 동화작가가 되고 싶은데 학원에 같이 갈 사람이 필요했다는 이유에서였어요. 저야 딱히 상관은 없어서 당시 홍대 근처에 있던 모 일러스트레이션 학원에 직장인 환급 과정 주말반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코튼지라던지 다른 다양한 도구들에 대해서 알게됐어요.
처음 시작은 수채화로 해보고 다양한 기법을 위해서 한 번씩 써보거든요. 저야 단기 과정이니 주로 수채화를 사용했고 코튼지를 알고나서는 브랜드별로 황목, 중목, 세목과 흰색과 미색까지 종류별로 전부 모았습니다. 그때 수채화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다시는 안한다고 했지만 거기서부터 시작이었을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조금씩 혼자서 그림을 그리면서 색연필도 모으고 펜도 모으고 책도 모으고 했어요. 그림 그리는 시간보다 알아보는 시간이 더 길었을 걸요. 그러다가 시넬리에 수채물감을 알게됐습니다. 꿀을 개서 만들었데요. 우와 'ㅁ' 게다가 호미화방에 14색 팬물감 세트가 들어왔었죠. 사실 홍대 근처에 안 살았으면 이렇게 안 됐을 수도 있겠네요. 아니 언젠간 이렇게 됐으려나?
다시는 수채물감을 안 하려고 했지만 시넬리에 수채물감을 써보니... 와우!
예전에 받았던 스트레스는 물감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쓰던 물감이 다들 많이 쓰는 신한수채물감이었거든요. 좋은 것이 좋다고 물감이 바뀌었을 뿐인데 수채화를 그리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물감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어요. 해외 사이트에서 직구도 했습니다. 지금이야 이것 저것 들어오지만 그땐 국내에서 구할 수 있던것이 많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가칭 패가망신당 분들을 알게됐습니다. 물감 사모은다고 지갑이 비는 사람들의 모임입죠. 왓슨님, 고넹님, 메이님, 샤루님 등과 많은 분들이에요. 신한커머스에서 하는 열린마당에서 처음 모였어요. 물감 칠 하면서 이야기하고 물감을 수입하고 서로 나누고 그림 그리고 했어요. 정말 그 해가 저의 인생 턴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 그룹도 그해에 만들어졌거든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물감은 안 만들겠다"라고 이야기했어요. 화구 덕질이지만 정말 그건 끝판 대장이라서 말이죠. 그땐 정말 생각 없었어요. 노트는 만들었지만요. 그건 정말 직구로도 못 구하던 거라 어쩔 수 없었단 말이에요.
자주 모이던 모임의 영향이었던 것인지 고넹님은 화방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넹님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이유는 물감 만드는 것의 불을 지피셨다는 거죠. 물감을 만들어보시겠다고 도구와 재료를 모았으나 하도 바쁘셔서 만들지는 못하고 계셨어요. 저야 만들지는 않았지만 지식은 가지고 있다보니 저와 물감 만드는 이야기할 때가 많으셨죠. 그러다 결국 만드는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완벽히 그 때문은 아니긴해요. 한 70%...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몸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들어 볼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비아르쿠 수성흑연이에요. 써보니 제 취향은 아니었지만 흑연을 붓으로 그리는 건 아주 매력적이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비아르쿠 수성흑연이 세일한다는 생각에 찾아보고 있었고 설록님이라던가 다른 분의 그림을 보고선 이걸 살까 말까. 아니면 그냥 만들어 버릴까 하고 있던 때였거든요. 그때 마침 고넹님의 이야기는 정말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야 말게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인더였습니다. 무엇을 얼마만의 비율로 넣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죠. 사실 찾아보면 상세한 레시피가 있고 재료 구하는 것도 어렵진 않았습니다만 전 최소한의 재료만 넣고 싶었어요. 많으면 귀찮거든요. 가장 처음으로 만든 흑연 물감은 정말 최소한으로 넣었지만 당시엔 제대로된 비율을 알지 못한 상태여서 너무 쉽게 녹았어요. 감각으로 비율을 맞추다보니 너무 많이 만들기도 했죠.
안료마다 들어가는 재료의 비율이 달라져야 합니다. 만들면서 알게된 것이 기본적인 재료로는 시중에서 파는 물감의 특성을 못 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쓰는 안료로는 쉬민케나 QOR같은 번짐을 못 내요. 그정도를 내려면 계면활성제를 넣어야 해요. 계면활성제란 것도 엄청나게 종류가 많기에 뭘 넣을지를 몰라요. 꿀을 넣으면 너무 잘 녹아요. 잘 녹으면 좋은 거 아니냐 하지만 물감이 잘 녹는다는 건 덧칠했을 때 잘 무너진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꿀 말고도 다른 것도 시험해봤어요. 뭐 결국 꿀을 썼지만요. 이유는 귀찮아서. 수분 양도 문제고 이게 영양가가 많은 물질이고 수분이 많다보니 잘 상합니다. 그에 대비한 대책도 필요해요.
아라빅검을 적게 쓰거나 안 쓸 수도 있더라고요. QOR의 아퀴졸이 대표적일 겁니다. 저는 물감을 만들 때까지 수채물감은 QOR빼고 아라빅검을 쓰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어요. 아퀴졸 말고는 뭐가 있는지 모르니 패스.
이것저것 귀찮아서 결국 표준 바인더를 만들었죠. 필요한 걸 추가하면 되도록이요. 바인더도 많이 만들고 물감도 많이 만들었네요.
옛날에는 물감을 만들어 쓰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건 정말 옛날 일이고 요즘은 다들 사서 쓰죠. 그게 편해요. 특히나 수채물감은 사서 쓰는게 편합니다. 그렇지만 물감을 만들어 쓰는 사람은 동양화를 하는 사람이나 템페라화를 그리는 사람 정도에요. 동양화에선 보통 길상 제품을 쓰는데 파는 다른 안료랑 별 차이는 없을텐데 동양화용이라고 나온 걸 쓰고 있어요. 석채물감도 다니엘 스미스에서 나오고 있고 말이죠.
웬일인지 때마침 미젤로에서도 안료가 나왔습니다. 출시된 안료 선택은 왜 그렇게 했는지 의문이에요. 왜 이게 없지 싶은 것도 있고 이것도 있네 라는 것도 있고요. 그래서 여러 안료를 사서 세팅했습니다. 국내에서 물감을 만들어 쓰는 사람이 잘 없는 탓인지 안료 구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리고 파는 안료라 하더라도 생각보다 색이 다양하지 않아요. 결국 해외에서 안료상을 통해 주문해야합니다.
그리고 많은 시험을 거친 끝에 12색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물감을 써보면서 이렇게 있어야겠다는 구성을 생각해 둔게 있어서 그걸 기준으로 만들었어요. 아직 고쳐야할 점이 많지만요. 계속 만들어 가면서 수정해야죠.
이름은 일단 맘대로 붙여봤습니다. 바뀔지도 몰라요. 특성도 만들 때마다 바뀔 거에요. 물감 세트를 구성할 때 컨샙은 과립이 잘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프탈로 블루 대신에 세룰리안 블루를 선택했고 프탈로그린 대신에 비리디안을 택했죠. 쨍한 느낌은 안나지만 자연스러운 색상을 만들 수 있어요. 세룰리안 블루 같은 경우엔 혼색에 좀 적응 해야하지만요.
만들어보니 확실히 색이 많이 진합니다. 만들면서 다니엘스미스 정도는 되겠지 했는데 다니엘스미스 이상이네요. 특히 세룰리안블루(PB35)와 비리디안(PB18)은 최고에요. 보라색은 울트라마린 핑크(PV15)를 썼습니다. QOR이랑 다니엘스미스에 있는데 그 색을 생각하다가 막상 만들어보니 좀 더 파랗네요. 코발트 바이올렛 대용으로 쓰려고 만들었는데 그것보단 더욱 바이올렛에 가까워요. 디옥사이드 바이올렛을 만들까 했는데 충분히 진하고 예쁘고 과립이 잘 생기는 바이올렛이라 마음에 드네요. 나중에 코발트 바이올렛을 만들어 끼워 넣어도 좋을 듯 해요.
안료도 확정이 아니고 다 쓰면 바꾸고 하겠죠. 구할 수 있는 것도 많지도 않고 마음에 드는 것만 있는 건 아니라 24색 확정하기도 까다롭네요.
이제 이걸로 그려봐야겠어요.